'실낙원' 연상호, 또 한 번 관객에 던진 물음 [인터뷰]

입력2026년 10월 19일(월) 07:00 최종수정2026년 10월 18일(일) 18:51
실낙원 연상호 감독 / 사진=CJ ENM
[스포츠투데이 정예원 기자] 인간은 무엇으로 자신을 규정하는가. 기억과 경험이 이어지기 때문에 지금의 나를 과거의 나와 같은 존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유전자만 같을 뿐 살아온 과정이 전혀 다른 존재도 같은 인격체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연상호 감독이 '실낙원'을 통해 꺼내 든 질문은 인간의 정체성과 실존이라는 오래된 화두를 향한다.

오는 21일 개봉하는 영화 '실낙원'은 9년 전 캠핑스쿨 버스 실종 사건으로 아들을 잃은 엄마 류소영(김현주)에게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들 류선우(배현성)가 기적처럼 살아 돌아오면서 시작되는 심리 스릴러다. '부산행' '지옥' '군체' 등 독창적인 상상력과 장르적 감각을 선보여온 연 감독의 신작이자 전작 '얼굴'을 잇는 저예산 시리즈다.

작품은 제51회 토론토국제영화제 스페셜 프레젠테이션 부문에 공식 초청되면서 화제성과 완성도를 동시에 인정받았다. 또한 월드 프리미어 공개 전부터 공식 상영 4회차(약 2300석) 티켓이 오픈과 동시에 전석 매진되는 기염을 토했다.

'실낙원'의 출발점은 연 감독의 모친이 쓴 짧은 글이었다. 아들은 닭을 훔치고 사람을 때리는 등 나쁜 짓을 일삼는다. 그런 아들을 끝까지 품은 어머니가 소멸을 결심한다는 것이 원안의 골자다. 연 감독은 이 이야기를 오래도록 곱씹으며 어머니의 심리를 들여다봤다. "'그 이야기를 아들에게 주는 건 어떤 마음이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저희 집에는 아들이 셋 있다. 저 혼자가 아니다. 그 세 명이 합쳐진 건가 싶기도 하다.(웃음)"

그는 어머니를 아들을 향한 집착이 강한 인물로 바라봤다. 다만 그 심리를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오히려 오랜 시간 고민한 끝에 도달한 결론은 '인간의 마음을 100%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고민은 대학 시절의 기억과도 연결된다. 미대 출신인 연 감독은 대학 시절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예술과 철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대학 시절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주인공은 어떤 심리였을까'를 놓고 토론한 적이 있다. 결국 실존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때는 그런 질문을 두고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눴는데, 지금은 AI가 큰 존재가 된 시대지 않나. 이런 질문이 오히려 더 중요해진 것 같다. 그렇다고 실존주의에 대한 거창한 토론을 하는 영화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 건 아니다. 관객들이 영화를 보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봤다."
실낙원 스틸 / 사진=CJ ENM

연 감독이 '실낙원'에서 주목한 핵심 개념은 정체성이다. 작품 속 인물 류소영과 류선우를 둘러싼 관계 역시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 그는 두 인물을 단순히 선악이나 인간과 AI의 대립으로 구분하기보다, 한 존재를 동일한 인격체로 받아들이는 근거가 무엇인지 묻고자 했다.

"어릴 때의 연상호와 지금의 연상호가 같다고 할 수 있는 건 연속성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도 경험이 이어지고, 그 경험이 지금의 나를 만든다. 그런데 류소영과 류선우는 그 연속성이 빠져 있는 인물들이다. 둘을 하나의 인격체로 이어주는 근거가 유전자뿐이라면, 유전자가 같다는 이유만으로 같은 존재라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런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연 감독은 인간과 AI의 가장 큰 차이를 '사색의 유무'에서 찾았다. "AI 선우는 마치 사색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류소영에 대한 반응일 뿐이다. 완벽하게 설명하는 능력만 놓고 보면 AI가 더 잘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에겐 설명할 수 없는데도 이해가 간다는 느낌이 있다. 저는 그 지점에서 정체성이 생긴다고 본다. 주인공의 심리에 완전히 동의하기 어렵다는 점도 중요했다. 그 간극이 있기 때문에 실존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지는 거다."

제목인 '실낙원' 역시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과 그에 대한 갈망이라는 오래된 주제와 맞닿아 있다. "이데아와 미메시스의 관계, 정토와 예토의 관계처럼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품어온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문화권에는 이상향이 있고, 거기에 도달할 수 없다는 처참함도 존재한다. 흥미로울 수밖에 없는 주제다. 그렇다고 제가 디스토피아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전 행복하게 살고 있다(웃음)."

또한 그는 "류선우가 스스로를 악마로 규정한 이유 역시 명확한 설명이나 교육의 결과라기보다 죄의식에서 벗어나려는 심리에서 비롯된 것으로 설정했다"며 "인물의 행동을 하나의 이유로 정리하기보다는, 그 안에 설명되지 않는 부분을 남겨두는 데 무게를 둔 것"이라고 짚었다.
실낙원 연상호 감독 / 사진=CJ ENM

여러 차례 호흡을 맞춘 김현주의 연기는 감각으로 다가온 영역이었다. "배우에게 이걸 해달라, 저렇게 해달라고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기는 어려웠다. '역광을 만들기 위해 뒤에 있는 차의 라이트를 켜놓자' 정도였다. 김현주 씨가 보여주는 연기는 굉장히 동물적이란 느낌이 있었다. 의문을 품기 시작하면 끝이 없지 않나. 본능적으로 연기하려는 느낌에서 기묘한 분위기가 나왔다. 저는 촬영을 했을 뿐이고,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배현성과의 인연은 '지옥2'에서 시작됐다고. "당시 김신록 씨의 아들로 잠깐 특별출연했는데 연기가 인상 깊었다. 몰입도도 남달랐는데 워낙 짧게 등장해 아쉬웠다"며 "그러다 제 영화를 돌아보니 젊은 남자 배우가 등장한 장면이 생각보다 별로 없더라. 제일 젊은 게 박정민, 최우식 정도였다. '이렇게 없나?' 생각하다가 배현성 씨가 떠올랐다"고 해 웃음을 자아냈다.

연 감독이 영화를 통해 관객에게 기대하는 것은 명쾌한 해답보다 영화가 끝난 뒤 이어지는 사색이었다. 다만 "관객이 그 질문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은 어렵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르영화와 예술영화를 위계적으로 구분하는 시선에 대한 생각도 밝혔다. "영화가 끝난 뒤 관객이 사색하는 것이 목적이지만, 거기까지 가는 길이 어렵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장르라는 틀로 이야기를 만드는 거다. 실존주의적인 영화라고 포장하고 싶지는 않다. 관객이 단순하게 몰입하고, 영화에서 주어지는 질문을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게 중요하다. 장르영화는 어떤 질문을 쉽게 전달할 수 있는 방식이지, 쉬운 사색만을 만들어낸다는 뜻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가 말하는 '쉽게 전달한다'는 문턱을 낮추되, 그 안에 담긴 질문의 깊이는 열어두겠다는 뜻이었다. "대중적인 방식으로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겠다. 그 방식 때문에 재밌지 않은 건 또 다른 문제다. 결국 재미라는 영역을 어디까지로 볼 것이냐는 제가 해결해야 할 숙제인 것 같다."
실낙원 연상호 감독 / 사진=CJ ENM

연 감독은 최근 전작 '얼굴'을 통해서도 새로운 작업 방식을 경험했다. "한 명의 직업인으로서 주어진 일들을 하는 거다. 그걸 잘못 이해하면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뜻인가' 싶을 수 있지만, 전혀 아니"라며 "저는 직업인으로서 하는 일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사랑한다. 다만 더 다양한 방식으로 만들어보는 게 저에게는 큰 휴식이고 재충전이다. '가스인간'에서 아오이 유우가 제가 쓴 대본을 연기한다는 사실 자체도 정말 재밌었다"고 말했다.

이어 "'얼굴'을 만들 때는 예산이 적으니 지분도 조금 러프하게 갔다. 생각보다 잘돼서 다 같이 파티도 했다. 하지만 막상 정산해 보니 빈틈이 보이더라. 그 부분은 보너스를 추가로 마련했다"며 "상업영화를 하던 사람이 작은 영화를 만든다고 해서 기존 산업의 질서를 흐트러뜨리는 건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독립영화 제작 지원도 받지 않았다. 또 독립영화로 인정받으면 예술영화관에 상영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도 하지만 그런 것도 진행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시도가 기존 작업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는 "'돼지의 왕'이나 '사이비'를 할 때는 영화의 정체성이 저라는 생각이 강했다. 그래서 '부산행'을 만드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며 "그런데 모든 사람이 아는 영화를 만든다는 데서 오는 기쁨도 있더라. 어느 쪽이 더 낫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각각 다른 즐거움이 있는 것 같다"고 회상했다.

배우들과의 작업에서도 창작자로서의 호기심과 대화가 출발점이 됐다. "같이 이야기하다 보면 대학 시절로 돌아가는 느낌이 있다. 고민도 많이 나눈다. 그러다 '이런 걸 같이 해보자'는 이야기가 나오는 거다. '이 작품을 하면 이런 상을 받을 수 있다'는 식의 상업적인 계산만으로는 같이 하자는 이야기를 하기 어렵다."

고대하던 배우와의 호흡도 언급했다. "아오이 유우와의 작업은 오래전부터 품어온 꿈이었다. 일본 드라마 '티셔츠가 마를 때까지' 현장에서 본 적이 있는데 짧은 만남에도 배우의 힘을 느꼈다"며 "배우 마츠 타카코와도 언젠가 함께 작업해 보고 싶다"고 바람을 드러냈다.

끝으로 연 감독은 '실낙원'이 던지는 질문의 여운을 남기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인간의 심리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건 힘들다고 생각한다. '이방인'의 주인공을 지금도 완전히 이해한다고 말할 순 없다. 다만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아, 이런 의미였나 보다' 하고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 간극 자체가 가치 있다고 느낀다."

[스포츠투데이 정예원 기자 ent@st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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